(출저:http://ppss.kr/archives/22122)
퀴어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혐오자를 포함한 여러 반대자들과 대치하던 중, 행렬 앞쪽에 있던 한두 분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이며 달래는데.. 울먹이는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제 마음을 무겁게 내리쳤습니다.
“신부님.. 저.. 저는.. 저 사람들한테 잘못한 것도 없고, 해를 끼친 것도 없는데, 왜 제 존재 자체를 저 사람들이 맘대로 부정하고 고치느니 마느니, 밖에 나오지 말라느니 저주하죠. 제가 뭘 잘못한 거죠..”
퀴어 퍼레이드와 혐오 및 반대자들의 대치하고 있던 중이라 시끄러운 가운데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 어깨를 토닥이다가 꼬옥 안아줬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워 계신 저 분들을 일으켜 볼까요???”
사람들의 큰 웃음과 힘찬 박수 소리. 그러나 제 마음과, 제 안팎에 자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마음은 크게 상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무지개 묵주를 만든 이유
거의 8-9년 전에 성공회 묵주를 개량해서 무지개 묵주를 만든 건, 한 성소수자와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순복음교회 전도사와 한세대 신대원을 그만 두고, 성공회대 신대원생이자 성공회 교회 신학생으로 다시 살던 제게 누군가의 소개로 찾아왔던 한 사람.
그 사람은 보수적인 개신교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부정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상처와 괴로움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정말 간절히 기도하면 변하느냐고 물었죠…
당시 성소수자 차별에 대해 반대하는 어렴풋한 입장만 갖고 있던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정성껏 들어주는 제게 그 분은 더 간절히 묻고 또 물었죠. 하지만.. 저는 끝내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런 나도 받아 주셨는데, 당신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실 거라고 머뭇머뭇 답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한두 달 후. 그분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겼고,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교회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먹먹함.. 미안함.. 함께 해주라고 주님께서 보내주셨는데..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내주셨는데.. 그렇게 용기 없이 떠나보낸 죄책감..
그렇게 저는 성공회 묵주를 개량한 성공회 무지개 묵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지개가 지닌 의미들.
언약. 주님은 당신 모습 그대로 당신을 구원하십니다!
소수자와의 연대. 주님과 나는 당신 모습 그대로 당신을 존중하고 함께 합니다!
다양성.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는 내 지식과 생각보다 큽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통해 다양하게 이뤄가시는 하느님 나라를 신뢰합니다!
뒤늦게 성소수자 신도님께 보내는 편지
아까는 너무 답답하고 슬퍼서 말하지 못했는데.. 지금 용기를 내서 말할게요.
“누군지 잘 모르는 OO님, 당신은 아무 것도 잘못한 것 없어요. 주님은 당신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 주세요. 이 땅의 일부 기독교가, 많은 보수 개신교인들이 저주하고 외치는 저 거짓말에 속지 마세요. 상처 받지 마세요.
저 사람들은 여성 목회자 안수를 반대할 때에도, 장애인 목사 안수를 반대할 때에도, 서양에서는 흑인과 유색인종을 반대할 때에도 똑같이 혐오의 언어와 행동으로 말했었요. 성경에 써 있다고요. 그런데 왜 지금은 달라졌죠?
결국 사랑이 이깁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이렇게 당신의 존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길벗이 되어 함께 하고 있는 우리들의 눈을 바라 보세요. 우리들의 마음을 들어 주세요. 저들의 혐오하는 눈과 저주하는 입술과 마음을 인정해 주지 마세요.
OO님. 이 밤.. 주님 때문에 사랑합니다. 주님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하셨듯이, 당신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사랑은 혐오를 이깁니다.”
그리고 지난 밤,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정리하고 만들어 본 “퀴어 퍼레이드 축복 기도문”을, 당신을 위해 다시 한 번 조용히 기도합니다.
퀴어 퍼레이드 축복 기도문
( ✝ 표시는 인도자들이, ☉ 표시는 참여자가 함께 합니다. )
✝ 천지만물,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든 것들에 깃들어 계신 우리들의 하나님.
☉ 이 좋은 날, 복된 자리에 우리를 불러 모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니 감사하나이다.
✝ 이 시간 간절히 소원하오니, 교회에서 상처받고 쫓겨난 모든 이들과 성소수자들이 그 모습 그대로 우리들의 새로운 식구가 되게 하시고,
☉ 주님의 입맞춤이 주는 힘으로 사랑의 관계를 되찾게 하소서.
✝ 주님의 이름을 악용한 모든 차별과 배제 그리고 혐오를 거절하며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 차별에는 거룩하고 차가운 분노로,
✝ 배제에는 끈기 있는 연대로,
☉ 혐오에는 힘 있는 축복으로 끝내 승리하게 하소서.
✝ 주님께서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축복하시는 성소수자,
☉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과 춤추며 웃고 떠드시는 우리들의 하나님.
✝ 우리가 모여 함께 울고 웃고 떠들썩하게 춤추며 즐거움을 나누는 이 자리를,
(여기서부터 한 구절씩 큰 소리로 외치며, 성수와 꽃잎을 뿌려 축복합니다.)
☉ 연약함으로 강하게 하시는 성부와 참사랑이신 성자와 우리들의 호흡이신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하오니,
✝ 이 자리와 이 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삶에 사랑이 넘쳐나게 하소서. 아멘.
퀴어 퍼레이드 후기
* 덧붙임. 오늘 용기 있게 함께 해 주신 많은 분들께 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6시 반쯤 먼저 자리를 떠나 미안했습니다.
여러 이유로 이름을 다 불러 감사하지는 못하지만, 함께 꽃잎을 뿌리며 축복의 통로로 함께 해주신 여러분. 정말 맘 깊이 감사합니다.
드러난 모습과 현상이 아닌, 그 깊은 이면에 흐르는 영적 이야기에 귀기울일 줄 아시는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길찾는교회는 언제나 여러분의 순례 여정에 함께 할 겁니다.
이 밤, 우리 주님의 호흡 안에서 평안히 잠드소서. 아멘.
편집자 주: 원래 제목에 천주교가 들어가 있었으나, 확인 결과 기독교만 참여한 것으로 드러나 제목을 수정했습니다.
민김 종훈(자캐오)(http://www.zacchaeus.kr/)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제, 성공회대학교 교목, 길찾는교회 공동기획자. 한영신대와 한세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여성인권 그룹 활동을 통해 세상을 배웠으며, 성공회 성북 나눔의집 활동가로 ‘동네 골목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성공회에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선교적 교회 운동의 하나이자 경계 위의 교회인 ‘길찾는교회’를 섬기고 있다. 평등 부부를 지향하기에, 동반자와 더불어 서로 거울삼아 조금씩 성장하는 아픔과 기쁨을 배우고 있다.
(편집자님께 토를 달자면 기독교 안에 천주교가 있습니다만...)
어제 퀴어 퍼레이드에서 있었던 일들을 뒤늦게 접하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지금껏 4, 5회 정도 퍼레이드에 참가하였는데 한번도 혐오자들의 시위와 맞닥뜨린 적은 없었다. 단순히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어제와 같이 조직적이고 집요한 방해 공작은 서울 퀴어 문화 축제 15년 사상 처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사이 사회가 보수화되었다기 보다는, 외려 성소수자들의 존재가 많이 가시화되어서 그에 대한 혐오도 그만큼 더 가시화 된 것이리라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호모포비아들이 성소수자들에 대해 내뱉는 망언은 익숙한만큼 많이 덤덤해졌다. 다만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저들이 혐오와 편견을 합리화하는 '도구'로서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찌기 바울은 로마서에서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라고 썼다. 신의 사랑은 무한히 넓고 깊은 과녁 같아서 우리가 도망치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빗껴나갈 수 없다. 성서에 이렇게 적혀 있거늘, 인간이 무엇일진대 감히 교만하게 타인을 "너는 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 정죄하는지 모르겠다.
거룩하고 차가운 분노, 끈기 있는 연대, 힘 있는 축복. 이 구절을 곱씹고 있다. 용감하고 참된 기독교인들이 퀴어 퍼레이드에 함께 하였음이 복되다. 연약함으로 강하게 하시는, 참사랑이며, 우리의 호흡이신 주님이 호모포비아들을 포함한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그리하여 세상을 병들게 하는 혐오를 멈출 수 있기를.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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